
[CEONEWS=박수남 기자] 급변하는 인공지능 시대, 예술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이 배포한 보도자료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러나 오는 8월 캐나다 몬트리올과 오타와에서 열리는 ‘한국-캐나다 융합예술 특별전 <21세기, 인간의 조건(Spectrum of Humanity)>’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기보다, 질문 그 자체의 무게와 깊이를 탐색하는 지적인 장(場)으로 읽어야 마땅하다. 이 행사는 단순한 문화 교류나 K-아트의 일방적 쇼케이스가 아니다. 오히려 기술이라는 거대한 거울 앞에 선 동시대 인류가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성찰할 것인가에 대한, 두 중견 문화 강국 간의 진지하고 치열한 대화의 시작이다.
행사의 성격은 협력 파트너의 면면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캐나다 국립영화위원회(National Film Board of Canada, NFB)와 뮤텍(MUTEK) 페스티벌이 그 중심에 있다. NFB는 캐나다 정부 산하의 공공 영화 및 디지털 미디어 제작·배급 기관으로, 노먼 매클래런의 실험 애니메이션부터 감시 기술을 통해 자연과의 관계를 묻는 인터랙티브 다큐멘터리Bear 71에 이르기까지, 상업적 논리를 넘어선 기술적, 미학적 혁신을 80년 넘게 주도해 온 기관이다. 뮤텍 또한 ‘실시간 시청각 퍼포먼스’와 ‘디지털 창의성의 지속적인 변주’에 헌신하며, 상업적 성공보다 예술적 발견과 실험을 우선시하는 북미의 희귀한 축제로 명성이 높다. 이들과의 파트너십은 이번 특별전이 기술에 대한 낙관이나 비관의 이분법을 넘어, 예술을 통한 사유라는 제3의 길을 모색하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기술이 인간 의식을 모방하고 재편하기 시작한 지금, ‘인간의 조건’이란 무엇인가. 그 근본적 물음이 몬트리올과 오타와의 서늘한 공기 속에 던져진다.
진화하는 노동의 유령: 공장에서 플랫폼으로
이번 특별전의 상영 프로그램은 기술 발전의 이면에 놓인 인간 노동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특히 임흥순 작가의 <위로공단>과 김아영 작가의 <딜리버리 댄서의 구>를 나란히 배치한 큐레이팅은, 산업화 시대의 공장부터 현재의 플랫폼 노동에 이르기까지 착취의 풍경이 어떻게 변모하고 지속되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역사적 서사를 구축한다.
육체를 갈아 넣던 과거: 임흥순의 <위로공단>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은사자상 수상작인 임흥순의 <위로공단>은 1970년대 구로공단 여성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한국 산업화의 눈부신 성과 뒤에 가려진 고통의 역사를 소환한다. 이 작품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위로’라는 행위에 집중한다. 감독은 봉제공장에서 40년 넘게 일한 자신의 어머니와 백화점 등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한 여동생의 삶에서 영감을 얻어, 개인의 서사를 한국 사회의 거대 담론과 연결한다.
영화는 기승전결의 전통적 서사를 따르지 않는다. 감독 스스로 ‘병풍 기법’이라 칭한 방식처럼, 노동자들의 파편적인 인터뷰들 사이에 초현실적인 퍼포먼스 영상이 경첩처럼 끼어든다. 얼굴에 천을 두른 두 여성이 숲을 헤매는 이미지는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연상시키지만, 감독은 환기 시설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먼지를 마시며 일했던 노동자들에게 “마스크를 씌워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는 그들의 익명성과 고립감, 그리고 동시에 그들이 공유했던 유사 자매 관계의 연대를 상징한다. <위로공단>은 노동의 역사가 아닌, “신념을 지니고 살아온 사람들의 역사”이며, 인간 존엄성에 관한 영화임을 웅변한다.
영혼을 잠식하는 현재: 김아영의 <딜리버리 댄서의 구>
<위로공단>이 과거의 유형(有形)의 노동을 다룬다면, 김아영의 <딜리버리 댄서의 구>는 현재의 무형(無形)의 노동을 겨냥한다. 작품의 배경은 ‘폭주하는 신자유주의와 플랫폼 노동’의 현실이다. 주인공인 배달 라이더, ‘딜리버리 댄서’는 더 이상 공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갇혀 있지 않다. 도시 전체가 그의 일터다. 그러나 그를 통제하는 것은 인간 관리자가 아닌, 보이지 않는 ‘인공지능 알고리즘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끊임없는 ‘감시와 통제’를 통해 노동자의 신체를 최적화하고 동기화한다. 과거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가 노동자의 육체를 기계의 리듬에 맞췄다면, 이제 알고리즘은 데이터를 통해 노동자의 정신과 시간까지 관리한다. 김아영 작가는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뒤섞는 ‘사변적 픽션’의 형식을 통해, 가상과 현실이 뒤엉킨 이 세계를 파헤친다. 그의 작업에서 노동은 더 이상 땀과 육체의 문제가 아니라, 데이터와 심리, 존재론적 불안의 문제가 된다. <위로공단>의 ‘공단’이 21세기에는 보이지 않는 ‘플랫폼’으로 진화한 것이다. 두 작품의 병치는 기술이 노동 환경을 재편할 수는 있어도, 그 안에 내재된 권력 불균형과 인간 소외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음을 서늘하게 증명한다.
주인의 도구를 해체하기: 문어, 아이폰, 그리고 창조의 본질
전시가 노동의 문제를 통해 기술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탐문했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 그 자체의 본질과 창작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되묻는다. 염지혜 작가와 박찬욱·박찬경 형제의 프로젝트 ‘파킹찬스’의 작품은 새로운 도구를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도구에 내재된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전복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대안적 지능을 향한 상상력: 염지혜의 <에이아이 옥토퍼스>
염지혜의 <에이아이 옥토퍼스>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의 ‘Artificial’을 ‘문어(Octopus)’로 치환하며, ‘문어지능(Octopicial Intelligence)’이라는 도발적인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인간의 지능을 모방하려는 현재의 AI 개발 방향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다. 작가가 주목한 문어는 뇌뿐만 아니라 8개의 다리 전체에 신경세포가 분포해, 중앙의 명령 없이도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움직이는 분산형 지능 체계를 가졌다.
이 작품은 서구 철학과 AI 개발의 근간을 이루는 ‘뇌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안적 지능’을 상상한다. 영상 속 문어는 “모든 건 연결되어 있어!”라고 속삭이며, 인지, 감각, 감정, 기억이 분리되지 않은 총체적이고 생태적인 지능의 가능성을 예언한다. 이는 인간 대 기계라는 대립 구도를 넘어, 다양한 지성과의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는 예술적 제언이다. 기술을 인간의 도구로만 여기는 관점에서 벗어나, 기술과의 관계 자체를 재설정하려는 시도다.
기술적 한계의 미학: 파킹찬스의 <파란만장>
2025년의 AI 시대 예술을 논하는 자리에 2011년 작 <파란만장>이 소환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박찬욱, 박찬경 감독의 협업 브랜드 ‘파킹찬스’의 첫 작품인 이 영화는 당시 최신 기기였던 아이폰 4로만 촬영되었다. 오늘날 AI가 그렇듯, 아이폰 역시 당시에는 창작의 문턱을 낮추는 ‘민주적’ 도구이자 영화 산업의 질서를 뒤흔드는 파괴적 기술로 여겨졌다.
중요한 것은 파킹찬스가 아이폰 4의 기술적 한계를 감추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야간 촬영 시 발생하는 노이즈나 화면이 뭉개지는 ‘깍두기 현상’까지도 영화의 독특한 질감과 기괴한 분위기를 만드는 미학적 요소로 적극 활용했다. 이는 “단점을 장점으로 만드는” 예술가적 태도의 승리이며, 도구의 정교함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창작자의 비전이 예술의 본질임을 상기시킨다. AI가 생성하는 이미지의 기술적 완성도에 대한 담론이 넘쳐나는 지금, <파란만장>의 사례는 예술이 기술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미학적으로 재정의하는 역할에 충실해야 함을 역설한다.
NFB와 MUTEK의 의미
이번 특별전이 캐나다, 특히 NFB와 MUTEK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은 단순한 장소 선정을 넘어선 전략적 의미를 갖는다. 이는 할리우드나 실리콘밸리로 대표되는 상업적 중심지를 벗어나, 공공적 가치와 예술적 실험정신을 공유하는 두 ‘중견국(middle power)’ 간의 첨단 대화를 시도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NFB는 앞서 언급했듯 정부 기관으로서 상업 논리에서 자유롭게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인터랙티브 미디어의 경계를 확장해왔다. 이번 컨퍼런스의 공동 사회자로 나서는 루이 리샤 트롬블레가 NFB의 ‘이노베이션 랩’ 디렉터라는 점은, 이번 교류가 기술과 예술의 접점에서 벌어지는 가장 현재적인 논의를 목표로 함을 시사한다. MUTEK 역시 마찬가지다. 이 페스티벌은 “관객과의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모험적인 프로그램을 선보이며, 춤을 추기 위한 공간이기보다 “몰입적인 사운드스케이프”를 통해 세심한 감상을 유도하는 지적인 행사로 정평이 나 있다. 이는 한국 작가들의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영상 작업이 전시될 최적의 맥락을 제공한다.
한국과 캐나다는 글로벌 패권 국가는 아니지만, 문화 예술에 대한 꾸준한 공공 투자를 통해 독자적이고 비판적인 문화 생태계를 육성해왔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양국의 국립현대미술관과 NFB 같은 공공 기관이 주도하고, MUTEK과 같은 비영리 단체가 협력하는 이 구조는, 기술의 미래에 대한 논의가 거대 자본의 이해관계를 넘어 사회적, 문화적, 철학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공유된 전장에서 공유된 미래로: 가평 전투의 메아리
이 미래지향적 예술 교류의 깊은 곳에는 양국의 관계를 다진 역사적 초석이 자리하고 있다. 보도자료는 ‘2024-2025 한국-캐나다 상호 문화교류의 해’의 또 다른 주요 프로그램으로 가평전투를 소재로 한 창작뮤지컬 <링크(R;Link)>를 함께 소개한다. 이는 단순한 병기가 아니라, 현재의 협력이 어떤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는 정교한 외교적 서사다.
1951년 4월의 가평전투는 한국전쟁의 향방을 가른 결정적 전투 중 하나였다. 당시 약 700명의 캐나다 프린세스 패트리샤 경보병연대 제2대대(2PPCLI) 장병들은 약 5,000명으로 추산되는 중공군의 파상공세를 막아내며 서울로 향하는 길목을 지켜냈다. 이들의 희생적인 방어는 캐나다 군사사에서 가장 위대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며, 이 공로로 캐나다 부대로는 이례적으로 미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 뮤지컬 <링크>가 양국 학생들이 공동 제작하고 캐나다 참전용사와 가족들 앞에서 공연된다는 사실은, 피로 맺어진 양국의 연대가 살아있는 역사임을 증명한다.
가평에서의 동맹이 20세기 냉전 시대의 이념과 영토를 지키기 위한 물리적 투쟁이었다면, 몬트리올과 오타와에서의 만남은 21세기 기술 시대의 의식과 의미를 탐색하기 위한 철학적 연대다. 38선이라는 국경을 함께 지켰던 양국이 이제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함께 사유하고 있다. 이는 양국 관계가 생존을 위한 군사 동맹에서 성찰을 위한 지적 파트너십으로 성숙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증거다.
해답이 아닌, 질문해야 할 인간의 의무
결론적으로, 한-캐나다 융합예술 특별전 <21세기, 인간의 조건>의 진정한 가치는 AI 시대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공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 가치는 기술, 노동, 지능, 창의성, 그리고 역사에 대해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들을 얼마나 정교하고 다층적으로 구성해냈는가에 있다.
임흥순과 김아영은 ‘자동화된 세계에서 존엄한 노동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염지혜는 ‘인간의 거울상 너머에 어떤 대안적 지능을 상상할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 파킹찬스는 ‘우리의 도구가 우리의 인식을 어떻게 규정하며, 이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가’를 탐구한다. NFB와 MUTEK과의 협력은 이러한 질문의 과정 자체가 예술의 핵심 역할임을 확인하며, 가평전투의 기억은 이 현대적 대화에 역사적 무게와 진정성을 더한다.
모든 문제에 대한 ‘최적의 해답’을 생성해낼 것처럼 보이는 기술이 범람하는 시대에, 더 어렵고, 더 근본적이고, 더 인간적인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야말로 인류에게 남겨진 가장 중요한 과업일지 모른다. 예술은 기술이 우리에게 들이대는 거울이지만, 동시에 그 거울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보는 법을 가르쳐주는 스승이다. 이번 특별전은 미래로 가는 지도를 제시하는 대신,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위치를 끊임없이 재측량하게 만드는 나침반을 손에 쥐여준다. 그 지독하고도 필연적인 불확실성 속에서, 질문을 멈추지 않는 행위야말로 ‘인간의 조건’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임을 역설하면서 말이다.